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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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7,340회 작성일 19-08-14 18: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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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침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무렵, 연해주지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은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오히로부미 저격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최재형선생이 있었다.
함경도 출신인 최재형은 1860년대 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가 새로운 주인이 된 연해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았고,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고생 끝에 1900년대 초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고, 도로 및 막사 공사, 군납을 해서 벌어들인 재산은 물론이고 그의 능력과 경험을 동포사회를 위해 사용하였다.
동포들이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바닷가에 사는 동포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지방 정부 시장)으로 추천할 정도였고,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할 정도로 동포사회도 그를 존경하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그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안중근 의거를 지원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샀고 의군의 숙식은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으로 많은 자금과 큰 저택을 보유했다. 대한의군은 신아산 전투등 국내진공작전에 연전연승 하고 영산전투에서는 참패했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 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켰다. 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렸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중근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안중근이 1910년 일본 법정의 불법재판 끝에 순국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일 전쟁 패전국인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곧 석방됐으나, 러시아 정부가 더 이상 그와 거래 하지 않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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